작업             약력

보이지 않는 순간들 (Blinde Momente)

2022
여러 겹의 트레이싱지에 알코올 마커

내 앞에 한 장의 종이가 놓여 있다.

나는 눈을 뜨고 세계와 그 안의 사물들을 바라본다. 눈을 감는다. 몇 초 동안 사물의 잔상이 형태를 바꾸며 눈꺼풀 뒤에 떠다닌다. 나는 그 움직임을 바라보며 그 형태를 붙잡으려 한다.

다시 눈을 뜨고, 기억에 의존해 잔상의 형태를 트레이싱지 위에 그린다.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아 그 형태를 확인한다. 그러나 처음의 잔상은 이미 사라지고, 또 다른 잔상이 나타나 움직이고 있다. 나는 이제 새로운 잔상을 기록하기 위해 이전에 그린 형태를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형태를 그린다.

다시 눈을 감고 잔상의 형태를 확인한다. 예상했던 대로 이번 잔상 역시 사라지고 새로운 잔상이 나타난다. 이전 잔상의 드로잉을 다시 지운다.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.

다시 눈을 뜬 채 세계와 그 안의 사물들을 바라보고, 눈을 감은 채 그 잔상을 바라본다. 그리고 다시 눈을 뜨고, 기억 속에 남은 잔상의 형태를 그린다. 곧이어 그 형태를 다시 지운다.

다시 새로운 종이 한 장...

이 드로잉은 눈앞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, 기억에 의존해 그려진다. 이미 각인된 잔상을 바탕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그리는 순간, 그 잔상을 만들어낸 원래의 대상은 자동으로 시야에서 사라진다. 현재의 시각적 경험을 아무리 집요하게 관찰하려 해도, 바로 그 순간 나는 눈앞에 있는 것을 온전히 바라보는 일로부터 멀어진다.

눈을 뜨고 있지만 나는 보지 못한다.
눈을 감고 있지만 나는 볼 수 있다.

나는 불확실한 잔상을 붙잡아 고정하기 위해 계속해서 보고, 기억하고, 그리고, 지운다.